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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궁&사찰

구리 동구릉(東九陵)사적 제193호

구리 동구릉(東九陵)사적 제193호

 

 

사적 제193호이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하였으며, 1855년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 참찬의 정부사 김인귀의 추천으로 하륜이 택정했다고
전한다.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이 자리하고 있다.

 

 

수릉 정자각

 

수릉(조선 제23대 문조.신정왕후)능
문조(1809~1830)는 제23대 왕인 순조의 아들이며, 제24대 헌종의 친아버지이다.

문조는 세자가 된 후에 돌아가셔서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추존 왕이 되었다.

문조와 그 무덤을 지칭하는 이름이 많이 있는데 1830년 돌아가신 후에 이름을 효명세자라고 올리고, 무덤의 이름도 연경묘로 불렀다.

1834년(헌종 즉위년) 아들인 헌종은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능이름도 수릉으로 높였다.

그후 1875년(고종12) 문조의 비 신성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익종을 문조로 함께 높이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조의 비 신정왕후(1808~1890)는 12세에 효명세자의 세자빈이 되었고, 1834년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26대 왕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생존하였다.

 신정왕후는 오랜 기간 조선 정계에 관여하고, 친정 인물을 다수 등용하며 19세기 세도정치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문조 수릉은 1830년 연경묘로 조성되었를 때 서울 성북구에 있는 경종 의릉 근교에 있었다.

이후 1846년(헌종12) 풍수 문제로 경기도 양주시로 옮겨지고, 1855년(철종6)에 이곳으로 옮겨져 동구릉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현재의 수릉은 1890년 신정왕후와 문조가 함께 묻힌 합장릉 형태로 조성되었다.

 

 

 

 

 

 

 

 

현릉(조선 제5대 문종, 현덕왕후)능

조선 제5대 왕인 문종(1414~1452, 재위 1450~1452)은 세종의 맏아들이며, 단종의 친아버지이다.

문종은 1421년(세종3) 왕세자가 되었고, 1450년 세종이 돌아가신 해 왕위에 올랐다. 임금자리에 있던 기간이 짧았지만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여러 책을 간행하였으며 39세의 젋은 나이에 경복궁 강녕전에서 돌아가셨다.

현덕왕후(1418~1441)는 1437년(세종19) 세자빈에 오르고, 1441년(세종23) 단종을 낳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실때 시호를 ‘현덕’으로 삼아 현덕빈으로 불리다가 문종이 즉위하면서 ‘현덕왕후’로 추승하였고, 무덤의 이름을 소릉으로 정하였다.

본래 현덕왕후의 능은 1441년에 경기도 안산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문종과 현덕왕후의 아들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후에 현덕왕후의 집안에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현덕왕후를 폐위시켰다.

그 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1513년(중종8)에 현덕왕후의 훼손된 무덤을 현 지역으로 모셔 문종 현릉과 동원이강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건원릉(태조)능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1335~1408년, 재위 1392~1398년)의 능으로 구리 동구릉(사적 193호)에 자리잡고 있다.

태조가 승하한 이후 풍수지리 등을 고려하여 명당자리를 찾아 6천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조성되었다.

고려 왕릉의 제도를 받아 들이면서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공민왕의 헌정릉 양식을 많이 따랐으며 내부는 석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봉분 주위에 곡장으로 두르고 석물의 배치 등이 이전 고려왕릉과 다른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부분도 있다.

 

건원릉 억새풀 이야기

건원릉 봉분에는 특이하게도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원래 태조는 고향 함경도 영흥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태종이 아버지를 먼 이북 땅에 모실 수 없으므로 고향에서 흙과 억새풀을 가져왔다고 한다.

봉분 위 억새풀은 특성상 자주 깎으면 죽으므로 4월 5일 한식 때만 한 차례 벌초 한다. 

 

건원릉 정자각(보물 1741호)

 

목릉(조선 제14대 선조와 인왕후,인목왕후)능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1552~1608)는 중종의 손자로 제13대 명종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돌아가시자 선조가 왕위에 올랐다.

선조가 임금의 자리에 있을 때 임진왜란과 같은 위기가 있었지만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유학을 증진하였기 때문에

훗날 선조의 시대를 지칭할 때 그 능의 이름을 따서 ‘목릉성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조의 첫번째 비는 의인왕후이다.

두번째 비는 인목왕후인데, 의인왕후가 돌아가신 후 1602년(선조35)에 왕비가 되었으며, 영창대군을 낳았다.

하지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도 왕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인목왕후는 다시 대왕대비에 오르게 된다.

목릉은 본래 1600년 의인왕후가 돌아가실 때 ‘유릉’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조성하였다.

1608년 선조가 돌아가신 후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목릉을 만들었다가 1630년 현 지역으로 능을 옮겼다.

1632년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목릉이라는 하나의 능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나의 정자각에 세기의 봉분이 있는 조선왕릉은 목릉이 유일하다.

 

 

 

 

 

 

 

 

 

 

 

 

 

 

 

 

 

 

 

 

 

휘릉(조선 제16대 인조,장렬왕후)능

제16대 왕 인조의 두번째 비인 장렬왕후(1624~1688)는 1638년(인조16)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다.

장렬왕후는 제17대 효종과 제18대 현종, 제19대 숙종 대까지 살았으며, 1688년(숙종14) 창경궁에서 돌아가셔서 휘릉에 안장되었다.

장렬왕후가 4대에 걸쳐 왕실의 웃어른이 되면서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하여 논쟁이 두차례 일어났다.

1659년 효종이 돌아가시자 효종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장렬왕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고,

1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서인이 실권을 잡았다. 1674년 장렬왕후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인선왕후가 돌아가시고

또다시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는데 이때에는 남인의 주장대로 1년동안 상복을 입게 되었다.

이 두 차례의 논쟁은 예송논쟁이라고 하며 예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 문제로 확산된 역사적 사례이다.

 

 

 

원릉(조선 제21대 영조와 정순왕후)능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1694~1776)는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가장 긴 52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1724년 제20대 왕 경종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일찍 돌아가시자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연잉군)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 여러 방면에서 치적을 남기는데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노론과 소론이 융합하도록 노력하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영조의 비는 정성왕후와 정순왕후 두 분이 있다.

정성왕후는 1704년(숙종30)에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와 혼인하였으며,

1757년(영조33)에 돌아가셔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홍릉에 안장되었다.

본래 영조는 정성왕후 홍릉 옆을 비워두어 자신이 안장될 터로 여겼으나 두번째 비인 정순왕후와 현재 지역에 안장되었다.

정순왕후(1745~1805)는 15세에 당시 66세인 영조와 가례를 올렸으며, 1800년에 정조가 돌아가시고 어린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오르자

왕을 대신하여 3년간 나랏일을 돌보았다. 영조와

 정순왕후 원릉은 1758년(영조34)에 완성된 <국조상례보편>의 내용을 충실히 구현하였으며,

원릉 비각에는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직접 쓴 표석이 남아 있다.

 

혜릉(조선 제20대 경종,단의왕후)능

단의왕후(1686~1718)는 조선 20대 왕인 경종의 첫번째 비로서, 1686년(숙종 12)에 탄생하여

1696년 경종이 세자였을 당시에 세자빈이 되었다가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718년(숙종 44)에 돌아가셨다.

단의왕후는 비록 살아서 왕후로 책봉되지는 못하였지만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로 추봉되었다.

그리고 1722년(경종2)에 세자빈묘로 소박하게 조성되었던 무덤을 능의 격에 맞추어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경종은 기존의 단의빈 묘를 단의왕후 혜릉으로 높이면서 능에 난간석, 무석인, 석양, 석호, 석마 등 석물을 추가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혜릉의 표석은 훗날 영조대에 이르러 세우게 되었다. 영조는 1746년(영조 22) 인근에 있는 현종 숭릉 표석을 본보기로 삼아 혜릉 표석을 제작하였다.

표석 앞면의 글씨는 당시 명필인 판충주부사 유척가가 쓰고, 뒷면의 글씨는 여선군 이학이 썼다.

 

숭릉(조선 제18대 현종.명성왕후)능
제18대 현종(1641~1674)과 그의 비 명성왕후(1642~1683)가 안장되어 있는 숭릉은 동구릉에서 네 번째로 조성된 왕릉이다.

현종 숭릉의 특이한 점은 숭릉 정자각에는 양쪽에 벽이 없는 익랑이라는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식을 가진 왕릉은 숭릉을 비롯하여 인경왕후 익릉, 장렬왕후 휘릉, 경종 의릉까지 4기가 있다.

이 중 숭릉 정자각 지붕은 유일하게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또한 숭릉 석물은 1659년 효종 영릉에서 사용하였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다.

효종 영릉은 본래 동구릉에 있다가 1673년(현종14)에 경기도 여주군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전에 사용하였던 석물을 모두 묻어 두었는데, 이듬해에 현종 숭릉을 조성하면서 효종 영릉의 석물을 꺼내어 다시 사용하게 된다.

이 내용은 숭릉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숭릉산릉도감의궤>에 남아 있는데,

숙종과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석물을 새로 만들게 되면 백성의 노고가 가중될 것을 염려하여 다시 쓸것을 명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숭릉 정자각